지난 주말, 태풍의 영향인가 뭔가해서 전날 미친 바람이 불었었다.
별 생각없이 뒷산에 운동하러 올라갔다가 커다란 도토리들이 엄청나게 떨어져 있는 것을 목격한 우리 모녀. 갑자기 2차 도토리 원정대가 되어버렸다.
도토리를 넣을 데가 없으니 주머니랑 후드티 모자에다가 도토리를 잔뜩 주워왔다.
도토리를 따는 게 아니라 줍는 게 맞는 것이라는 것을 제대로 증명했다고나 할까 ㅋㅋㅋ
전날 미친 바람에 아이들이 모조리 떨어졌나보다. 다람쥐가 왜 욕심쟁이 이미지를 갖게 되었는지 깊은 공감을 하며 다람쥐 밥을 잔뜩 훔쳐왔다.
맙소사. 지난번에 도토리 안에 벌레가 너무 많은 것을 발견했던 엄마는 도토리를 모조리 껍질을 까서 도토리묵을 만들겠다고 각오를 다지셨다. 저 많은 도토리를..... 까기 시작했다.....
멀쩡하게 잘생긴 도토리 속에 벌레들이 엄청 많았다...... 사람들처럼 얘들도 겉만 보고는 알 수가 없는 애들이다. 근데, 이거 언제 다 까냐? ㅠ.ㅠ
왜 인터넷 한 번 뒤져볼 생각을 못했을까?
힘들게 도토리 까다가 손가락에 물집이 잡혔다고 그랬더니 나나언니가 물을 부어서 소금을 뿌려 놓으면 벌레 먹은 도토리들이 떠오른다고, 걔들을 버리고 나머지로 갈아서 도토리묵을 만드는 것이라고 알려주더라고. 헐........ 엄마?
어쨌든 까도 까도 끝이 없는 도토리를 까고 또 깠다. 맙소사.
이게 내 생애 내가 먹는 마지막 도토리묵이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며 이 놈의 도토리들의 옷을 가차없이 벗겼다. 엄청나게 많은 벌레들과 마주쳤고, 그 때마다 깜짝깜짝 놀래서 도토리를 집어던져 온 바닥에 벌레먹은 도토리들이 굴러다녔지만, 이 쬐끄만 벌레들에게조차 질 수 없다는 각오로 끝을 봤다. 아몬드 같이 생긴 아이들이 딱딱한 껍질 속에 들어있었다.
물론 엄마가 90%를 깠고, 나는 10% 정도 깠을까...... ㅋㅋㅋㅋ
물에 담가서 좀 불리고, 푸드프로세서로 갈았다. 레알 100% 홈메이드 도토리묵님 되시겠다.
곱게 간 도토리는 체에 받쳐 물에 거른다. 도토리묵의 전분을 뽑아내는 과정?? 면보 같은데 통째로 싸서 물 속에 넣고 주물럭 주물럭 하는 것이 더 쉬울 것 같다며.... 저러다 한 덩어리 도토리 가루를 물 속에 투하시키면, 말짱 도루묵이 뭔 말인지 알 게 된다......ㅡ.ㅡ;; 말짱 도토리묵이라며!!!
한 대야의 도토리물과 모래같은 도토리 가루로 분리되었음!!
가만히 놔두면 저렇게 시뻘건 물과 밑에 가라앉은 앙금으로 나뉜다.
생전 처음 도토리묵을 만들어 보는 우리 모녀는 과연 농도를 맞출 수 있을지 걱정을 하며... 시뻘건 물은 버리고, 앙금에 물을 좀 부어 가스렌지에 올리고 휘젓기 시작. 엄청난 속도로 휘젓고 있는 것처럼 사진은 보이지만.... 몹시 여유있으신 어머니의 손놀림이었다며. 둘이 번갈아가며 팔이 아플 때 까지 젓다보면 빡빡해지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집안은 온통 삶은 밤 향기로 가득.
갑자기 도토리를 왜 꿀밤이라고 부르는지 깨달음을 얻음.
그런데 이거 젓고 있다보니 어디서 많이 보던 비주얼인데..... 얼그레이쨈을 만들던 때가 급 떠오르며 이거 내 얼그레이쨈이랑 비슷하게 생겼는데? 싶다. 그 당시에도 이렇게 미친듯이 저었는데, 그 컬러감이나 질감이 이거랑 거의 흡사!!! 맛도 없는 도토리묵 말고 달콤고소한 스콘에 얼그레이쨈을 척 올려서 한 입 크게 베어 물었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 멈추고 저어야 한다.
보글보글 기포가 올라올 때까지 끓이면 된다고!!!
도토리묵 완성. 동그란 그릇마다 잔뜩 부어두고, 큰그릇 작은그릇 도대체 몇 개를 만든건지....
다행히도 물조절에 성공했는지 그럴듯한 도토리묵이 되었다.
강력한 떫은 맛에 몸을 배배꼬던 우리 모녀. 엄마는 완성된 도토리묵을 물에 투하. 거의 반나절을 전신욕을 시켰다. 그랬더니 목욕탕에 오래 있다 나오면 손가락 끝이 쪼글쪼글해지듯이, 이 아이들도 표면이 쪼글쪼글해졌다 ㅋㅋㅋㅋㅋ 괜찮다, 쪼글이 안보이게 뒤집으면 된다!
캬~ 도토리묵이 완성.
그냥 뭉텅뭉텅 썰어서 양념장 올려서 먹기도 하고, 묵무침으로 만들어 먹기도 하고.
난 단 하루 먹고 질려버린 도토리묵.
이모네도 갖다 주고, 옆집에도 나눠 주고, 엄마 친구들도 나눠 주고...
연휴 맞은 동생이 내려와서 자기는 도토리묵 좋아한다며 잔뜩 먹고 가고.
그렇게 먹고도 아직 남아있는 도토리묵. 몸 속에 중금속 성분을 배출하는 기특한 역할을 한다고 하니까.... 내 생애 마지막이 될 도토리묵을 꾸역꾸역 먹어야겠다.
엄마랑 다짐하길, 앞으로 혹여나 묵이 먹고 싶거든 메밀묵을 먹자며 ㅋㅋㅋㅋㅋ
이로써 도토리묵 원정대 활동은 영구 종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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