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오만한 젊음의 날들

9_아다지오 소스테누토

by 또NEW 2014. 10. 2.

 


아다지오 소스테누토

저자
문학수 지음
출판사
돌베개 | 2013-02-25 출간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책소개
감성과 지성이 어우러진 인문주의자의 클래식 읽기 음악은 애초에 ...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검색창에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를 친 건 책을 다 읽고, 독서 노트를 덮은 후였다.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유튜브에서 찾아서 틀어두고, 저렇게 한 음 한 음 꾹꾹 눌러서 명확한 소리를 내려고 했던 것이 글렌 굴드였구나, 피아노 건반을 하나 누르는 데서도 성격을, 가치관을 느낄 수 있어서 재미있었다. 내가 늘 말하는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을 또 한 번의 확장. '아는 만큼 들린다.' 바흐의 cello suites를 종종 듣는데, 유튜브에 Bach를 검색하면 자주 글렌 굴드를 만날 수 있었다. 글렌 굴드는 청중을 싫어했고, 돈을 벌기 위해서 콘서트홀에 섰다고 당당히 말했으며, 20대 동안 딱 10년만 돈을 벌겠다고 마음 먹었으며 32살이 되었을 때 은퇴를 했다고 한다. 이렇게 신념대로 사는 사람들이 멋있게 느껴진다. 그래서 오래도록 예술가들을 동경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다지오'가 느리게 연주하라는 뜻인 건 학교에서 배웠는데, '소스테누토'는 뭐지? '소스테누토'는 빠르기의 의미가 아니라 음을 하나 하나 충분히 눌러서 무겁게 연주하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라는 말은 음을 하나 하나 충분히 눌러 느리게 연주하라는 작곡가의 명령이라고 강신주 박사님이 추천사에 정리해주셨다. 이 뜻을 알게 되고 더욱 더 음악이 인문의 한 분야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 삶의 방식도 음악의 연주처럼 안단테로 일상을 살기도 하고, 아다지오로 느려지기도 하고, 프레스토 때로는 프레스티모의 빠른 걸음이 필요하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니까 한 분야의 전문가로서 자신의 분야 밖에 모르는 채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음악가라기 보다 기능인이라고 보는 것이 맞는 것일 수 있겠다. 본질이 아니라는 것. 주위를 둘러보면 도대체가 현재의 전부가 다 본질이 아니다. 책을 읽으며 조금씩 '알아 가는 과정'을 겪으며 둘러보는 세상은 전부 가짜다.

 

나는 피아노 연주를 좋아했다. 물론 듣는 것의 수준에서 말이다. 그렇지만 모짜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를 들었다기 보다는 이루마나 유키 구라모토를 들었다. 오래 전, 고등학교 때의 일이다. 그 이후로는 그런 것조차도 듣지 않았는데, 최근에 현악기 연주가 너무 좋은거다. 비발디의 사계나 바흐의 cello suites 같은. 그러면서 클래식 음악이 듣고 싶었다. 유튜브로 듣고 싶은 음악을 잘 듣고 지내다가 어느 날, 제대로 들어보고 싶은데.... 라는 지적 허영이 스물스물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 때, 벙커원의 클래식 강의가 하나 올라왔는데, 강신주라는 이름에 잠깐의 망설임 없이 듣기 시작했다. 이 책의 저자 문학수, 그의 후배 강신주의 <더클래식> 북콘서트 개념의 강의였다. 사실 강연의 내용은 크게 기억이 나지 않고, 깁갑수의 나쁜 인문학의 클래식 부분과 내용이 마구잡이로 섞여 있었는데, 두 권의 책 제목만은 기억에 남았다. <더클래식> 그리고 <아다지오 소스테누토>.

 

다니엘 바렌보임과 자클린 뒤프레에 관한 이야기처럼 드라마틱한 요소가 더해지면 음악 듣기의 재미가 생길 것 같아서 이런 종류의 책들을 읽고 싶었던 것인데, 짧은 시간에 한 권의 책으로 조각조각의 이야기들을 듣는 것은 큰 효과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백과사전과 효용 면에서 큰 차이가 없었다. 머릿속에 남는 이야기가 별로 없다는 것. 이미 알고 있었던 이야기들만 다시 기억이 날 뿐. 머리가 아파졌다. 애초에 사상누각같은 것이었다. 시간의 힘이 필요한 것 아니겠는가. 그냥 궁금했던 말러를 찾아 들어본다거나(책의 설명만으로는 뭔가 거친 느낌의 곡일 거라고 생각되어 내가 좋아하지 않을 스타일의 음악일 것 같지만서도...) 토마스 만의 소설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찾아 읽어본다던가, 잠 못이루는 밤에 바흐의 골드베르크 협주곡을 듣는 다거나, 미워했던 다니엘 바렌보임의 피아노 곡을 들어본다거나 하는 정도의 노력을 할 동기가 생겼다는 것에 만족해야 할 듯하다. 또 스비야토슬라프 리히테르(Sviatoslac Richter)라는 피아니스트의 슈베르트도 들어보고 싶어졌다. 타협을 하지 않는 이런 캐릭터들에게 자꾸 매력을 느낀다. 내가 이루고 싶은 것이 이런 '신념을 지키는 삶인가' 혹은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을 동경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현대 음악계의 거장이라고 고등학교 때 배웠던 카라얀은 나치에 충성을 맹세하고 적극적으로 기회를 이용했던 기회주의자이며 예술가라기 보다는 정치가의 마인드로 살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새로 알게 되었다. 내 기억속엔 병든 조강지처를 버린 놈이었던 다니엘 바렌보임은 현대 음악에서 보기 드물게 인문학적인 음악을 하는 사람이었다. 

지금껏 아는 게 아는 게 아니었고, 알면 알수록 전부 본질이 아닌.... 카오스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이다. 이 혼돈의 세상 속에서 아다지오 칸타빌레 소스테누토. 천천히, 노래하듯이, 정확한 소리를 내며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 오만한 젊음의 날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난치병 : 하림  (0) 2014.10.12
드디어 도토리묵  (0) 2014.10.10
나의 화이팅 노래, Big girls don't cry  (0) 2014.10.08
바둑 고수, 이창호 9단의 인터뷰  (0) 2014.10.02
8_오래된 미래  (0) 2014.09.28
7_주식바로보기  (0) 2014.09.26
One day : Caro Emerald  (0) 2014.09.25
프로젝트 한자 800  (0) 2014.09.2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