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오만한 젊음의 날들

여행이 떠나고 싶은 날들

by 또NEW 2014. 6. 15.

 

 

 나는 여행을 자주 하는 사람이 아닌데 '잘 지내고 있냐'는 안부 인사보다 '너 요새는 어디니'라는 질문을 더 많이 받는 것 같다. 

나는 현재 실업 수당도 없이 몇 개월의 백수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 몇 개월간 연고도 없는 울산 어느 골짜기에서 잠적해 살고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안거'의 시간이라고 표현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종종 상상해 보지만, 사실은 팔랑거리는 가벼운 커리어 히스토리를 가지고 몇 번의 취업 실패를 겪으면서 자존감 상실로 인해 가라앉아버렸다는 말이 더 맞는 것 같다. 지극히 수동적인... 지갑이 가벼워지면 마음이 무거워 진다고 했던 괴테의 말처럼, 호기로웠던 사직서의 끝은 잘나고 못나고를 떠나 그냥 백수였다. 여자 나이 서른 둘에 시집도 안가고 지 몸하나 못 가누고 엄마한테 얹혀서 백수 생활을 몇 개월 째 하고 있는 잉여의 생활은 상상을 초월하게 고통스러운 일이다. 쓰리 콤보로 불효를 저지르면서 매일 엄마의 한숨 하나, 주름 하나에 죄책감을 가져야 하는 날들.

그래서 여행이 떠나고 싶은 날들.

 

10대의 나는 무기력했고, 그 반동 효과라도 생긴건지 20대의 나는 크레딧 카드 따위 없어도 용감했다. 어려운 상황이 생길 때마다 행운의 여신이 도운 것처럼 일이 풀렸고, 나는 그 행운의 여신을...그러니까... 여신인데.... '동수 오빠'라고 불렀다. 누군가 주장하듯이 사람이 살면서 주어진 행운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면 어쩌면 내 행운의 90% 이상을 20대에 다 소비해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어느 우울한 날엔 해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뭐든 꿈꾸는 것들을 다 이뤄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기가 찾아오는 날에는 까짓꺼 인생의 몇 달, 몇 년쯤 그냥 그렇게 보낼 수도 있는거지... 이 참에 '즐거운 백수 생활' 같은 글이라도 써볼까 하는 긍정의 화신이 되기도 한다. 단지 그 기운이 오래 머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천에 옮겨보는 일은 없었다. 그동안의 오르락 내리락의 날들을 겪으면서 '나' 자신을 가지고 드문드문 생체 실험을 해보고 몇 가지의 데이터를 모호함 속에 축적하고 있을 뿐. 좋게 말해 나를 알아가는 시간이었고, 한심하게 그걸 서른이 넘어 하고 있다니 스스로도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래서 그냥 여행이 떠나고 싶은거다. 도망치듯이. 멀리. 아주 멀리. 오래도록. 잊혀질 만큼 오래도록. 20대에 해봤는데, 나쁘지 않았던거다. 어쩌면 20대에 저지른 그 모든 것들 중에 유일하게 나쁘지 않았던 것이 여행이었다는, 판도라의 상자같은 발견을 해버린거다.

 

여행을 떠나고 싶다. 

그런데, 그 시기가 지금이면 너무 비겁할 것 같다. 1%의 머뭇거림도 없이, 단호박 같은 결심이 설 때까지 기다려보기로 했다. 이제 시작한 '나'를 들여다보며 실험을 하는 일을 조금 더 해보아야 할 것 같다. 이 실험이 '짠'하고 어떤 예기치 않은 결과물을 만들어 내거나, 실험이 쌓여 보다 높은 단계의 임상 단계로 옮겨갈 시기가 도달하거나, 혹은 애써 한 실험이 완전히 망가져 더 이상 이걸로는 회생의 기회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거나... 그런 날이 올 때까지 일상을 더 살아봐야 할 것 같아서 쌩뚱맞게 블로그를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서른'이 되었을 때, 나는 좋았다. 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여유가 좋았다.

어이없이 회사가 망해 쫒겨나면서도 '이 때가 기회'라며 핀리핀으로 여행을 가서 유유자적했을 정도로 그 때엔 내 마음은 단단해져 있었다. 그 뒤로 2년 간, 내 인생 최대의 암흑기를 지나오며 단단한 척하던 내 세계가 완전히 붕괴되어 버렸다. Zero에서 시작해야 할 땐, 그냥 가는 거다.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그냥 가는 거다. 다시 붕괴되지 않으려면 벽돌 하나를 쌓더라도 잘 쌓아야 내일이 생긴다는 걸 이젠 알기에 일상을 잘 살아내기 위해 '나'를 가지고 하는 이 실험들을 기록으로 남겨두려고 한다.

 

그러니까 이 구구절절한 글을 남기는 이유는 여행을 떠나고 싶어서.   

여행을 잘 떠나고 싶어서다.

 

 

댓글